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문단 편집) === 몰락과 말년 === 외세와 용병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피렌체 외교를 겪으면서, 마키아벨리는 자국 시민군의 필요성을 더욱더 절감하게 되었다. "오로지 돈을 위해 싸우는 용병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피렌체 시민군의 창설에 앞장섰으며, 많은 노력을 통해 시민군을 육성하고 이를 이용하여 [[피사 공화국|피사]]를 재탈환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를 둘러싼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체사르 보르자가 몰락하고 남긴 땅을 [[베네치아]]가 손쉽게 접수하자, 교황은 [[신성로마제국]]([[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509년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단 하루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베네치아가 외국인들에 의해 너무나 무자비하게 짓밟히자 교황 [[율리오 2세]]는 민족적 아픔을 느꼈는지[* 이때 교황이 내건 구호가 "야만인들을 쫓아내자!" 였다. 여기서 야만인은 바바리안, 즉 [[이탈리아]] 북쪽에 사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을 가르킨다.] 돌연 태도를 바꿔, 베네치아와 스페인과 손을 잡고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내쫓기로 결심한다. 피렌체는 이런 갑작스런 대결구도 변화에 무척 불편해졌다. 피렌체 공화국의 전통적 우방인 프랑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피렌체가 이 전쟁에 참여해야 된다"며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피렌체는 전쟁에 소규모 분대를 보냈고 그 분대는 당연하게도 교황의 분노를 샀다. 피렌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했지만 더이상 외교술은 한계에 봉착했고, 자국의 군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화국은 1512년 [[메디치 가문]]의 두 형제를 앞세운 스페인군의 가벼운 공격에 어이없이 함락되었다. 이후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피렌체의 체제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군주국으로 되돌려졌다. 이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혔고 결국 15년간 있었던 공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직후 메디치 가문 암살 모의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면서 날개꺾기 고문[* 스트라파도(Strappado; 매달기)라고 한다. 손을 뒤로 묶어 매달고, 높은 곳에서 갑자기 떨어뜨려 어깨 탈구를 일으키는 고문으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연이어 하면 한시간 이내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문. 단,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상대적으로 데미지가 덜하다. 중세 종교재판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어 악명을 떨쳤다.]을 6번이나 당하기까지 했다. 실제로는 그 암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는데, 운이 좋게도 율리오 2세가 갑자기 말라리아열에 걸려 죽고, 뒤를 이어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면서, 기분이 좋아진 동생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대규모 사면을 실행하였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가까스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히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산트 안드레아의 작은 농장이 있어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였다. 하지만 부과된 벌금을 갚아야 했고,[*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있었을 때의 봉급 10년치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다행히 친구들의 탄원과 보증으로 유예되어 벌금을 천천히 납부하여 나중에는 다 갚았다.] 동시에 가족들을 부양했었기 때문에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생계를 위해 농장 일은 물론 귀족 자제들의 강사 일까지 맡았다. 그럼에도 피렌체를 위하여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그는, 메디치 가문의 햇병아리 군주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로렌초]]에게 《군주론》을 저술하여 바치려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원래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줄리아노]]에게 《군주론》을 바치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꿔 피렌체의 새로운 군주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로렌초]]에게 바치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실제로 군주론을 바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친구들이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있어서, 메디치 가문은 애초에 《군주론》을 못봤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에리카 베너 『여우가 되어라』 이영기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8, p.497 참조)] 하지만 실제로 군주론을 바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키아벨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화국을 추종하는 젊은 귀족들의 모임인 '오르티 오리첼라리'[* 오르티 오리첼라리는 루첼라이 가문에서 주최하는 지식인 모임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 모임의 장소 이름이 '오르티 오리첼라리'.)]에 참여하며 코시모 루첼라이, 차노비 부온델몬티, 필리포 스트로치 등과 교제를 나누었다.[* 결국 '오르티 오리첼라리'의 젊은 귀족들은 피렌체 군주정을 뒤집고 다시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음모를 꾸미다가 들켜서 사형당했다.] [* 그래서 《군주론》은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반면, 《군주론》은 철저히 군주의 시각에서 저술한 책이기 때문에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시민(다수)'과 '법'을 따르는 공화주의적 관점은 《군주론》을 읽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군주론》 안에서도 공화주의적 관점을 찾아볼 수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저술, 편지, 활동 등이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서, 단순히 '마키아벨리가 그 순간만큼은 철저히 군주의 입장에서 《군주론》을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과 토론에서 나눈 얘기들을 바탕으로 훗날 공화주의의 고전이 되는 《로마사 논고》를 지었다. 《전술론》과 《피렌체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렇게 10여 년간을 저술활동에 힘썼다. 하지만 당장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희극 《만드라골라》 덕분이었다. 이 희극은 크게 성공해서 작가로서 마키아벨리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희극으로 얻은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이용해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신임을 얻었고, 성벽 공사를 총괄하는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고위공직은 아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피렌체에 인민 봉기가 일어나고, 때마침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용병들을 내세워 [[사코 디 로마#1527년, 카를 5세의 용병들에 의한 약탈|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을 포로로 삼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져서 힘의 공백이 생기자, 피렌체의 공화주의자들은 다시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고 공화정 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다시 고위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원하던 제2서기관 선거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한다.[* 사보나롤라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이 미는 후보가 서기관 선거에 당선되었다.] 희망이 무너진 그는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고 얼마 못 가 1527년 6월 21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는 조그만 가족묘에 묻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갔고, 결국 18세기엔 그 명성에 걸맞게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의 웅장한 묘로 이장되었다.[* 이곳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 [[엔리코 페르미]] 등의 묘도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져 있다.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위대한 이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